
그는 조선통신사 시절 신유한이라는 조선인과 함께
통신사 길을 간 일본 현지의 석학입니다.
그는 임진왜란은 일본의 불학무식을 드러낸 것이라 비판했습니다.
1728년 아메노모리 호슈가 대마도(쓰시마번)의 후대 외교관들을 위해 쓴 조선 외교 지침서
교린제성(交隣提醒)에 나오는 말입니다.
- 交 (사귈 교): 서로 사귀다, 오고 가다.
- 隣 (이웃 린): 이웃, 옆에 있는 나라.
- 提 (끌 제 / 일깨울 제): 손으로 끌어올리다, 혹은 주의를 환기하여 일깨우다.
- 醒 (깰 성 / 일깨울 성): 술에서 깨어나다, 혹은 정신을 차려 깨닫다.

임진왜란으로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조선 내에서
조선인은 :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약 46만 명에서 120만 명 사이로 추정됩니다. 전투, 기근과 역병으로 죽은 인구가 상당수를 차지합니다. 기록에는 조선군 약 7만 명, 백성 약 15만 명 등 구체적 수치도 있으나, 실제 피해 규모는 훨씬 컸습니다. 당시 조선 인구는 1000만명으로 추산합니다. 현재는 7천 700만명이죠.
일본인: 조선에 간 일본군 중 약 13~ 14만 명이 사망하거나 치명적 부상을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일본군의 전체 참전 병력이 약 22~30만 명 수준이었으니 절반이 손실된 셈입니다.
일본 내에서
조선인 포로는 약 2만 명(일본 측 자료)에서 10만 명 내지 40만 명(한국 측 추정)으로 추산됩니다. 상당수가 이동 질병, 영양실조, 노역으로 죽었습니다. 일부는 포르투갈 상인 등에 의해 동남아시아나 유럽까지 노예로 팔렸습니다.
일본인: 본토 내에서 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으로 사망한 일본인 수치는 정확한 통계가 없습니다. 다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력다툼으로 많은 일본인이 희새오디고 전쟁 징집과 세금 수탈로 농민들이 피폐해졌으며, 도요토미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 등 내부 권력 다툼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1719년 통신사 당시 신유한은 39세, 아메노모리 호슈는 52세로 13세 연장자였습니다.
갓을 쓴 신유한과 일본 전통 네모난 모자를 쓴 아메노모리 호슈가 만났지만
임진왜란 이후라 두 사람이 첫 인상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망연지교라고 나이를 잊고 식자들은 교류하는 것이 통례였지만 말입니다.
처음에 신유한은 [해유록]에서 아메노모리에 대해
얼굴이 푸르고 말이 무거우며 마음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기록했습니다.

당시 대마도주(대마번주)에게 절을 하고 시를 지어주면 상을 주었던 관행이 있는데
신유한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아메노모리의 기록에는 신유한이 부정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결국 조선통신사 여행을 끝내고 돌아갈 때에는
"다시는 이승 땅에서 뵐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인사까지 했다고 합니다.
망연지교가 일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